반튼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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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튼 술탄국은 16세기 초 수난 구눙자티에 의해 이슬람화된 후, 1527년 데막 술탄국의 지원을 받아 순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성립되었다. 후추 무역을 기반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아궁 티르타야사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내전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갈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 네덜란드에 병합되면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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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튼 술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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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반텐 술탄국 |
현지 명칭 | 스 Sunda: 스-Arab: كسلطانن بنتن 스: Kasultanan Bant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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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이슬람교 |
공용어 | 반텐어 (주로) 말레이어 (무역 및 외교) 치르본어 순다어 치코넹 람풍어 |
수도 | 올드 반텐, 세랑 |
정치 | |
정치 체제 | 술탄국 |
군주 칭호 | 술탄 |
주요 지도자 | 마울라나 하사누딘 (1552–1570) 아겡 티르타야사 (1651–1683) 마울라나 무함마드 샤피우딘 (1809–1813) 샤리프 무함마드 아슈-샤피우딘 (2016–현재) |
역사 | |
건국 | 1526년 |
주요 사건 | 샤리프 히다야툴라의 반텐 정복 (1527) 순다 왕국 정복 (1527) 치르본 술탄국으로부터 독립 (1552) 자야카르타 함락 (1619) VOC의 괴뢰 국가화 (1683) 프랑스 제국에 합병 (1808) |
멸망 |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합병 (1813) |
존속 상태 | |
상태 | 법률상 치르본 술탄국의 지방 (1526–1552) 드마크 술탄국의 종주권 하 (1527–1546) 독립 국가 (1547-1682) 네덜란드 제국의 괴뢰 국가 (1683–1813)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인도네시아 |
이전 국가 | |
이전 국가 | 순다 왕국 치르본 술탄국 드마크 술탄국 |
이후 국가 | |
이후 국가 | 반탐 레지던시 반탐 대통령령 바타비아 |
2. 역사
1526년 이전, 치반텐 강 유역에는 반튼 기랑이라 불리는 정착지가 있었다. 이곳은 "상부 반튼"을 의미하며, 순다 왕국의 지배를 받는 힌두교 지역이었다.[2] 16세기 초, 수난 구눙자티는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반튼 기랑에 도착했다.[3][4] 그는 데막 술탄국에 반튼 점령을 요청했고, 데막-순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 하사누딘이 이 군사 작전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다.[2]
구눙자티와 그의 아들은 반튼 기랑에 정착하여 반튼 항구와 켈라파를 장악했다. 수라위세사 왕은 이를 막을 힘이 없어 1531년 데막 및 치르본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7] 구눙자티는 하사누딘을 반튼의 투멩궁으로 임명했고, 데막의 술탄 트렝가나는 그에게 여동생과의 결혼을 제안하며 새로운 왕조와 왕국이 수립되었다. 올드 반튼은 이 왕국의 수도였으며, 치르본 술탄국의 주로 유지되었다.[2]
술탄 하사누딘은 향신료 무역, 특히 후추 무역을 부활시키고자 했다. 그는 남부 수마트라(오늘날의 람풍 주)로 여행하여 후추 공급을 확보하고자 했다.[2] 그는 치반텐 강 어귀 해안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왕궁은 강의 두 팔로 형성된 삼각주에 세워졌고, 도시는 주요 도로로 구획되었다. 왕궁 남쪽에는 왕의 광장이, 서쪽에는 대사원이 위치했다. 외국인들은 왕궁 밖에 거주했으며, 서부 항구는 국제 무역, 동부 항구는 국내 무역을 담당했다.[8]
1552년부터 1570년까지 반텐을 통치한 하사누딘은 람풍(수마트라 남부)으로 지배 지역을 넓혀 순다 해협의 유일한 교역로 지배자가 되었다. 그 결과, 순다 해협을 통과하는 상인들은 반텐 항구에서 활동하도록 의무화되었다. 왕국에는 구자라트, 페르시아, 중국, 터키, 페구(남부 버마), 케린의 상인들이 많이 방문했다. 하사누딘은 인드라프라 왕의 딸과 결혼했고, 인드라프라 왕은 후추 산지인 스레바르의 토지를 넘겨주었다.
마울라나 유수프는 파쿠안 파자자란을 함락시켜 순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농업과 관개 시설을 확충하여 왕국의 경제력을 강화했다.[2] 1579년 파쿠안을 빼앗았을 때, 파쿠안 왕 프라부 세다가 전사하면서 서부 자바 최후의 힌두 왕국이었던 파자자란 왕국이 붕괴되었다.
마울라나 무하마드는 1596년 팔렘방을 공격, 지배하기 위해 직접 왕국의 군대를 지휘했다. 수마트라의 후추나 농산물 등의 집산지로 삼기 위해, 말라카 해협의 끝에 위치한 이 상업 항구를 점령할 목적이었다. 원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팔렘방을 거의 점령할 뻔했으나, 무하마드가 저격당해 사망하면서 실패했다.[2]
아불마파히르 시대에 코르넬리스 데 호트만이 이끄는 네덜란드인들이 처음으로 반튼에 도착하고,[10] 이후 영국인들도 진출하여 무역 거점을 설립했다.[11] 1596년 코르넬리스 데 호트만이 이끄는 네덜란드인들이 반텐 항구에 도착하여 향료 구매를 목적으로 하였다. 1603년에는 반텐 항구에 네덜란드 상관이 개설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바타비아(자카르타)를 건설하고 반튼과 경쟁하기 시작했다.[12] 1619년 얀 피터스존 쿤이 반텐 동쪽에 있는 바타비아에 요새를 건설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본거지로 정했다. 반텐 왕국은 영국과 연합하여 이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반튼은 무역항이자 이슬람교 포교의 중심지로서 발전했다. 발전의 지리적 요인은 다음과 같다.
요인 | 설명 |
---|---|
반튼 만 위치 | 양호한 항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순다 해협 끝 |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포르투갈이 말라카의 지배권을 장악한 후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어 이슬람 상인의 무역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반튼은 치레본과 함께 서부 자바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
후추 생산 | 중요한 수출품이 있어 외국 상인들을 끌어들였다. |
급속도로 발전하는 반튼에는 구자라트, 페르시아, 중국, 터키, 페구, 켈린, 포르투갈 등 많은 외국 상인들이 방문했다. 도읍에는 켈린인(푸코잔), 아랍인(푸티난), 중국인 등 출신지별 집락이 곧 형성되었다. 한편 인도네시아 상인은 반다, 믈라유, 자바 등 독자적인 집락을 형성했다. 그 외에도 대장장이, 도공 등 주민의 직능에 기초하여 형성된 집락도 존재했다.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은 유럽 대륙에서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반튼에 네덜란드인이 도래한 것은 포르투갈인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반튼 왕국은 자유 무역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기에, 포르투갈인이 원했던 무역 독점은 실패로 끝났다.
아궁 티르타야사 시대에 반텐 술탄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치사다네 강과 파실리안 강을 연결하고, 타나라와 폰탕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는 등 대규모 관개 사업을 추진했다.[2] 1678년 술탄 아젱은 티르타야사 마을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했다.[2] ''티르타야사''라는 용어는 "수자원 관리" 또는 "수력학"을 의미하며, 이는 술탄의 자부심을 보여준다.[2]
아궁 티르타야사는 마닐라와 무역을 시작하고, 유럽 국가들과 경쟁하며 자체 무역 함대를 육성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14] 1660년대까지 반텐은 인도양과 남중국해에서 유럽 회사와 무역 경쟁을 할 수 있었고, 수라트와 런던에도 공장을 설립했다.[2]
아궁 티르타야사는 치레본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마타람 술탄국과 대립했다. 1671년에 술탄 아궁 티르타야사는 아들 술탄 아부 압두 카하르를 섭정으로 임명했지만, 통치권 전반을 포기하지 않았다. 1676년에 메카 순례를 하고 온 아들 술탄 아부 압두 카하르는 술탄 하지를 칭했다. 술탄 하지는 네덜란드와 좋은 관계를 구축했기 때문에 술탄 아궁 티르타야사는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
1682년, 아궁 티르타야사는 왕궁을 습격했다. 젊은 술탄은 네덜란드의 도움을 요청했고, 내전이 벌어졌다. 아궁 티르타야사 술탄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반텐과 바타비아에서 포로로 잡혀 1692년에 사망했다. 내전의 결과 반텐은 네덜란드에 종속되었고,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반텐 요새를 철거하고 항구 입구에 포트 스필베이크를 건설했다.[2]
1800년경,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파산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회사의 소유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국유화되었다. 1808년,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이었던 헤르만 빌렘 덴델스는 영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대우편도로 건설을 지시했다. 덴델스는 반튼의 술탄 알리유딘 2세에게 수도를 아녀르로 옮기고 우중 쿨론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술탄이 이 명령을 거부하자, 덴델스는 반튼을 침공하여 수로소완 궁전을 파괴했다. 술탄과 그의 가족은 체포되어 포트 스필비크에 수감된 후 암본으로 추방되었다.[16]
1808년 11월 22일, 덴델스는 세랑에서 반튼 술탄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토에 흡수되었다고 선언했다.[16] 1813년,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가 술탄 무하마드 샤피우딘에게 강제로 왕위를 포기하게 하면서 반튼 술탄국은 완전히 소멸했다.[17] 이는 반튼 술탄국의 종말을 알리는 결정타였다.
2. 1. 반튼 술탄국의 성립 (16세기)
1526년 이전, 치반텐 강 유역에는 반튼 기랑이라 불리는 정착지가 있었다. 이곳은 "상부 반튼"을 의미하며, 순다 왕국의 지배를 받는 힌두교 지역이었다.[2] 16세기 초, 수난 구눙자티는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반튼 기랑에 도착했다.[3][4] 그는 데막 술탄국에 반튼 점령을 요청했고, 데막-순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 하사누딘이 이 군사 작전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다.[2]구눙자티와 그의 아들은 반튼 기랑에 정착하여 반튼 항구와 켈라파를 장악했다. 수라위세사 왕은 이를 막을 힘이 없어 1531년 데막 및 치르본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7] 구눙자티는 하사누딘을 반튼의 투멩궁으로 임명했고, 데막의 술탄 트렝가나는 그에게 여동생과의 결혼을 제안하며 새로운 왕조와 왕국이 수립되었다. 올드 반튼은 이 왕국의 수도였으며, 치르본 술탄국의 주로 유지되었다.[2]
술탄 하사누딘은 향신료 무역, 특히 후추 무역을 부활시키고자 했다. 그는 남부 수마트라(오늘날의 람풍 주)로 여행하여 후추 공급을 확보하고자 했다.[2] 그는 치반텐 강 어귀 해안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왕궁은 강의 두 팔로 형성된 삼각주에 세워졌고, 도시는 주요 도로로 구획되었다. 왕궁 남쪽에는 왕의 광장이, 서쪽에는 대사원이 위치했다. 외국인들은 왕궁 밖에 거주했으며, 서부 항구는 국제 무역, 동부 항구는 국내 무역을 담당했다.[8]
1552년부터 1570년까지 반텐을 통치한 하사누딘은 람풍(수마트라 남부)으로 지배 지역을 넓혀 순다 해협의 유일한 교역로 지배자가 되었다. 그 결과, 순다 해협을 통과하는 상인들은 반텐 항구에서 활동하도록 의무화되었다. 왕국에는 구자라트, 페르시아, 중국, 터키, 페구(남부 버마), 케린의 상인들이 많이 방문했다. 하사누딘은 인드라프라 왕의 딸과 결혼했고, 인드라프라 왕은 후추 산지인 스레바르의 토지를 넘겨주었다.
2. 2. 번영과 발전 (16세기 후반 ~ 17세기 초)
마울라나 유수프는 파쿠안 파자자란을 함락시켜 순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농업과 관개 시설을 확충하여 왕국의 경제력을 강화했다.[2] 1579년 파쿠안을 빼앗았을 때, 파쿠안 왕 프라부 세다가 전사하면서 서부 자바 최후의 힌두 왕국이었던 파자자란 왕국이 붕괴되었다.마울라나 무하마드는 1596년 팔렘방을 공격, 지배하기 위해 직접 왕국의 군대를 지휘했다. 수마트라의 후추나 농산물 등의 집산지로 삼기 위해, 말라카 해협의 끝에 위치한 이 상업 항구를 점령할 목적이었다. 원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팔렘방을 거의 점령할 뻔했으나, 무하마드가 저격당해 사망하면서 실패했다.[2]
아불마파히르 시대에 코르넬리스 데 호트만이 이끄는 네덜란드인들이 처음으로 반튼에 도착하고,[10] 이후 영국인들도 진출하여 무역 거점을 설립했다.[11] 1596년 코르넬리스 데 호트만이 이끄는 네덜란드인들이 반텐 항구에 도착하여 향료 구매를 목적으로 하였다. 1603년에는 반텐 항구에 네덜란드 상관이 개설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바타비아(자카르타)를 건설하고 반튼과 경쟁하기 시작했다.[12] 1619년 얀 피터스존 쿤이 반텐 동쪽에 있는 바타비아에 요새를 건설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본거지로 정했다. 반텐 왕국은 영국과 연합하여 이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반튼은 무역항이자 이슬람교 포교의 중심지로서 발전했다. 발전의 지리적 요인은 다음과 같다.
요인 | 설명 |
---|---|
반튼 만 위치 | 양호한 항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순다 해협 끝 |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포르투갈이 말라카의 지배권을 장악한 후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어 이슬람 상인의 무역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반튼은 치레본과 함께 서부 자바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
후추 생산 | 중요한 수출품이 있어 외국 상인들을 끌어들였다. |
급속도로 발전하는 반튼에는 구자라트, 페르시아, 중국, 터키, 페구, 켈린, 포르투갈 등 많은 외국 상인들이 방문했다. 도읍에는 켈린인(푸코잔), 아랍인(푸티난), 중국인 등 출신지별 집락이 곧 형성되었다. 한편 인도네시아 상인은 반다, 믈라유, 자바 등 독자적인 집락을 형성했다. 그 외에도 대장장이, 도공 등 주민의 직능에 기초하여 형성된 집락도 존재했다.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은 유럽 대륙에서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반튼에 네덜란드인이 도래한 것은 포르투갈인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반튼 왕국은 자유 무역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기에, 포르투갈인이 원했던 무역 독점은 실패로 끝났다.
2. 3. 전성기와 쇠퇴 (17세기 중반 ~ 18세기)
아궁 티르타야사 시대에 반텐 술탄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치사다네 강과 파실리안 강을 연결하고, 타나라와 폰탕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는 등 대규모 관개 사업을 추진했다.[2] 1678년 술탄 아젱은 티르타야사 마을에 새로운 궁전을 건설했다.[2] ''티르타야사''라는 용어는 "수자원 관리" 또는 "수력학"을 의미하며, 이는 술탄의 자부심을 보여준다.[2]아궁 티르타야사는 마닐라와 무역을 시작하고, 유럽 국가들과 경쟁하며 자체 무역 함대를 육성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14] 1660년대까지 반텐은 인도양과 남중국해에서 유럽 회사와 무역 경쟁을 할 수 있었고, 수라트와 런던에도 공장을 설립했다.[2]
아궁 티르타야사는 치레본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마타람 술탄국과 대립했다. 1671년에 술탄 아궁 티르타야사는 아들 술탄 아부 압두 카하르를 섭정으로 임명했지만, 통치권 전반을 포기하지 않았다. 1676년에 메카 순례를 하고 온 아들 술탄 아부 압두 카하르는 술탄 하지를 칭했다. 술탄 하지는 네덜란드와 좋은 관계를 구축했기 때문에 술탄 아궁 티르타야사는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
1682년, 아궁 티르타야사는 왕궁을 습격했다. 젊은 술탄은 네덜란드의 도움을 요청했고, 내전이 벌어졌다. 아궁 티르타야사 술탄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반텐과 바타비아에서 포로로 잡혀 1692년에 사망했다. 내전의 결과 반텐은 네덜란드에 종속되었고,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반텐 요새를 철거하고 항구 입구에 포트 스필베이크를 건설했다.[2]
2. 4. 멸망 (19세기 초)
1800년경,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파산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회사의 소유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국유화되었다. 1808년,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이었던 헤르만 빌렘 덴델스는 영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대우편도로 건설을 지시했다. 덴델스는 반튼의 술탄 알리유딘 2세에게 수도를 아녀르로 옮기고 우중 쿨론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술탄이 이 명령을 거부하자, 덴델스는 반튼을 침공하여 수로소완 궁전을 파괴했다. 술탄과 그의 가족은 체포되어 포트 스필비크에 수감된 후 암본으로 추방되었다.[16]1808년 11월 22일, 덴델스는 세랑에서 반튼 술탄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토에 흡수되었다고 선언했다.[16] 1813년,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가 술탄 무하마드 샤피우딘에게 강제로 왕위를 포기하게 하면서 반튼 술탄국은 완전히 소멸했다.[17] 이는 반튼 술탄국의 종말을 알리는 결정타였다.
3. 정치
데막 왕국의 신하였던 파타힐라가 반텐을 이슬람화한 뒤, 그의 아들 하사누딘이 반텐 지역을 다스렸다. 그는 제2대 왕이 되어[1] 1552년부터 1570년까지 반텐을 통치하며 왕국의 정치 기반을 확립했다.
하사누딘은 람풍(수마트라 남부)으로 지배 지역을 넓혀 순다 해협의 유일한 교역로 지배자가 되었다. 그 결과, 순다 해협을 통과하는 상인들은 반텐 항구에서 활동하도록 의무화되었다.
1570년 하사누딘이 사망한 후, 아들인 파누반한 유수프가 뒤를 이었다. 농업과 관개에 힘쓰며 왕국의 지배 지역을 확대했다. 1579년 파쿠안을 빼앗았을 때, 파쿠안 왕 프라부 세다가 전사하여 서부 자바 최후의 힌두 왕국이었던 파자자란 왕국이 붕괴되었다. 10년간 통치 후, 파누반한 유수프는 중병으로 사망했다.
파누반한 유수프가 병에 걸리자, 왕국의 대신들은 당시 9세였던 마울라나 무하마드를 칸젠 라투 반텐이라 칭하며 왕으로 옹립했다. 대신들이 후견인이 되어 왕이 통치할 수 있을 때까지 정치 활동 전반을 수행했다.
1596년 팔렘방 공격을 위해 칸젠 라투 반텐은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 말라카 해협 끝에 위치한 상업 항구인 팔렘방을 점령하여 수마트라의 후추나 농산물 등의 집산지로 삼을 목적이었다. 원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팔렘방을 거의 점령할 뻔했으나, 칸젠 라투 반텐이 저격당해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왕위는 당시 5세였던 아들 아부 알-마파키르(Pangeran Ratu)에게 계승되었다. 아부 알-마파키르는 왕실 종교학자 자야누가라의 보좌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유모였던 냐이 웅반 랑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아부 무파키르가 죽은 후, 아들인 술탄 아부 마알리 아마드 라흐마툴라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 시대에 왕국은 신흥 세력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진출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라흐마툴라 사후, 아들 술탄 아궁 티르타야사(술탄 아궁)가 1651년부터 1692년까지 왕국을 통치했다. 술탄 아궁 티르타야사는 왕국을 확장하고, 네덜란드인을 바타비아에서 몰아내려 했다. 네덜란드에 대항하기 위해 교역 활동을 진흥시키고, 군대에 명령하여 약탈을 감행했다. 또한, 주민들을 선동하여 치앙케에 있는 네덜란드 소유의 사탕수수 농장을 습격하게 했다.
1671년 술탄 아궁 티르타야사는 아들 술탄 아부 압두 카하르(술탄 아부 압두 카하르)를 섭정으로 임명하고 티르타야사에서 은둔했지만, 통치권 전반을 포기하지 않았다. 1674년 술탄 아부 압두 카하르는 메카 순례를 하고 터키를 방문한 후 1676년에 귀국했다. 이후 그는 술탄 하지(술탄 아부 압두 카하르)를 칭했다. 술탄 하지는 네덜란드와 좋은 관계를 구축했기 때문에 술탄 아궁 티르타야사는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술탄 하지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술탄 아궁 티르타야사는 체포된 후 바타비아에 수감되었고, 1692년에 생을 마감했다.
술탄 하지의 승리는 반튼 왕국 붕괴의 시작이었다. 반튼 왕국이 네덜란드 측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술탄 하지는 단순한 꼭두각시에 불과해졌다.
4. 경제
반튼 술탄국의 경제는 후추 무역을 기반으로 발전했다.[18] 순다 해협의 전략적 위치 덕분에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중국 기록인 ''주번지''에는 적어도 13세기부터 순다 해협 양쪽 지역과 주요 항구인 ''신토''(순다)가 훌륭한 후추 생산지로 유명하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반튼 항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선대 왕국인 고대 순다 왕국의 주요 상품 중 하나였으며, 무슬림 반튼은 힌두교 선대의 확립된 후추 무역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실제로 후추는 중국, 무어인,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덴마크 상인 등 외국 상인들이 반튼으로 몰려들게 했다.[18]
중국, 인도, 터키, 포르투갈,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에서 온 상인들이 반튼 항구를 자주 방문했다. 향신료, 실크, 중국 도자기, 금, 보석 및 기타 아시아 상품은 유럽 상인들을 매료시켰다. 반튼은 국제 무역의 선구자였다.[18]
덴마크 상인들도 후추를 찾기 위해 트랑케바르에서 도착했다. 이러한 무역 관계는 아궁 티르타야사 술탄이 덴마크의 프레데릭 3세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19]
1570년 하사누딘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Maulana Yusufid가 뒤를 이었다. 그는 농업과 관개에 힘쓰며 왕국의 지배 지역을 확대하는 데 힘썼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반튼에는 구자라트, 페르시아, 중국, 터키, 페구, 켈린, 포르투갈 등 많은 외국 상인들이 방문했다. 도읍에는 켈린인들의 켈린 집락, 아랍인들의 푸코잔 집락, 중국인들의 푸티난 집락 등 출신지별 집락이 곧 형성되었다. 한편 인도네시아 상인들은 반다 집락, 믈라유 집락, 자바 집락 등 독자적인 집락을 형성했다. 그 외에도 대장장이, 도공 등 주민의 직능에 기초하여 형성된 집락도 존재했다.
5. 사회
반텐 지역이 파타힐라에 의해 이슬람화된 이후, 사회는 이슬람교의 규칙과 법에 따라 운영되기 시작했다. 파자자란 왕국이 멸망한 후, 이슬람의 영향은 내륙 지역으로 더욱 확산되었다.[1]
술탄 아궁 티르타사야 통치 시기에는 백성들의 생활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후 네덜란드가 정치 제도에 간섭하면서 상황이 점차 악화되었다.[1]
6. 문화
반텐에서는 종교적 관용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무슬림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특정 공동체들은 예배 시설을 건설할 수 있었다. 1673년경에는 반텐 항구 주변 지역에 여러 사원이 세워졌다.[22]
1676년경, 수천 명의 중국인들이 망명을 신청하여 반텐에서 일했다. 이러한 이주 물결은 푸젠과 중국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발생했다. 이들 공동체는 주로 해안과 강 주변에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인도 및 아랍 공동체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한편, 반텐에서는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 포르투갈과 같은 여러 유럽 공동체 그룹도 치 반텐 주변에 숙소와 창고를 건설했다.
왕정 국가였기 때문에 민중 문화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반텐의 건축 예술에서는 16세기에 건립된 반텐 아궁 이슬람 사원, 얀 루카스 칼데르(바타비아에서 도망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네덜란드인)에 의해 세워진 왕궁 건물, 반텐 카이봉의 대문이 남아있다.
7. 종교
이슬람교는 반텐 술탄국의 국교였다. 1527년 데막 술탄국이 반텐 기랑을 점령하고 힌두교 순다 왕국을 이슬람 왕국으로 바꾼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이슬람 신앙 전파에 대한 열망이었다.[2] 그러나 무슬림의 경쟁자이자 가톨릭 국가인 말라카의 포르투갈이 자바에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지정학적 조치라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15세기경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이슬람교가 확산되는 데에는 통치 계급을 대상으로 한 무슬림 개종자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당시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인도 해안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한 아시아 상인 계급의 주요 신앙이 되면서 이점을 얻었다.
서부 자바에서 이슬람교가 평화롭게 확산되었다고만은 할 수 없다. 반텐 기랑, 칼라파, 파자자란의 순다 왕국 점령은 군사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순다인 포로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해야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텐의 왕들은 토착 내륙인인 바두이족에게 이슬람교 개종을 강요하지 않아, 그들이 오늘날까지 고유 신앙과 생활 방식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었다. 반텐의 군주는 비무슬림 "고지대" 용병으로 구성된 경호 연대를 유지하기도 했다.[2] 또한 상인들을 위해 중국 민간 사원과 기독교 교회 건설을 허용했다.[20]
반텐은 이슬람 학문과 교육의 중심지로도 알려져 있었다.[18] 실제로 이슬람교는 반텐 문명의 주요 구성 요소였다. 이슬람교의 종교 의식, 축제, 관습(예: 왕자의 할례)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고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술탄 다음으로 반텐의 카디(종교 재판관)는 권위를 가지고 반텐 궁정에서 중요한 지위를 누렸다. 종교 문제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기 위해 인도와 아라비아에서 온 많은 울라마들이 반텐으로 초청되었다. 페산트렌 종교 학교가 왕국에 설립되었으며, 카수냐탄의 페산트렌은 16세기 마울라나 무하마드 왕의 후원하에 도시 남쪽에 설립되었고 왕의 종교 스승이 이끌면서 가장 권위 있는 학교 중 하나였다.[2]
반텐의 이슬람 학자들 중에는 셰이크 유수프가 있었다. 그는 마카사르 출신 학자였으며 아궁 티르타야사 술탄 밑에서 일했다. 아궁 술탄은 반텐의 첫 번째 원양 항해 선박을 제다 항구로 보내 아들을 메카 순례에 참여하게 하여 술탄 하지(Sultan Haji)를 군도에서 처음으로 하지 순례를 간 군주로 만들었다. 이는 반텐이 더 큰 움마(이슬람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위신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2]
19세기까지 메카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인도네시아 학자들의 대다수는 반텐 출신이었다. 예를 들어, 아르샤드 타윌 알-반타니의 스승인 셰이크 나와위 알-반타니는 타나라 출신으로 아랍어로 여러 작품을 썼고 메카에서 교수로 가르쳤으며 메카 대사원의 이맘이 되었다.[21] 이러한 종교적 위신은 반텐을 아체와 함께 더 큰 이슬람 움마 내에서 소속감을 느끼게 했고, 이 왕국을 군도에서 저명한 이슬람 정치체 중 하나로 만들었다.
반텐 지역이 파타힐라에 의해 이슬람화된 이후, 사회는 이슬람교의 규칙과 법에 따라 운영되기 시작했다. 반텐 왕국이 파자자란 왕국을 무너뜨린 후, 이슬람의 영향은 더욱 내륙으로 확산되었다.
8. 역대 술탄
수난 구눙자티의 아들인 술탄 마울라나 하사누딘이 1552년부터 1570년까지 반튼을 통치했다.[23] 하사누딘의 뒤를 이어 술탄 마울라나 유수프(1570년 ~ 1585년), 술탄 마울라나 무하마드(1585년 ~ 1596년)가 차례로 술탄 자리에 올랐다.
술탄 아부 알-마파키르 마흐무드 압둘카디르는 1596년부터 1647년까지, 술탄 아부 알-마알리 아흐마드는 1647년부터 1651년까지 통치했다. 술탄 아부 알-파트 압둘 파타(술탄 아겡 티르타야사)는 1651년부터 1683년까지 재위했으며, 술탄 아부 나샤르 압둘 카하르는 1683년부터 1687년까지 술탄이었다.
이후 역대 술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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